장마비가 촉촉히 대지를 적시던 날...
고향집을 가는 길에 매번 제비원 미륵불을 만나게된다.
자주 보는 석불이라서 무덤덤하게 스쳐 지나가기만 한 세월이 얼마인지 까마득하기만 하다.
모처럼 만에 둘러보는 제비원의 미륵불...비의 힘때문일까...적막한 분위기에 휩싸인 석불의 모습에서 애잔함을 찾아본다.
제비원 미륵불은 고려시대의 석불로 자연 암석에 조각하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 얹은 마애불이다.
인자하게 뻗은 긴 눈과 두터운 입술, 그리고 잔잔한 미소가 어려있는 표정으로 토속적인 느낌이 강한
고려시대 불상 양식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예로부터 안동 지방에서는 ‘제비원미륵’으로 불려졌으며, 보물 제 115호로 지정되었다.
불상이 위치하고 있는 주변 경관은 경주 신선암 마애불과 흡사하고,
머리 부분을 따로 조각하여 얹은 점은 파주 용미리 불상과 같은 형식이다.
높이 9.95m, 너비 7.2m의 암벽을 동체(胴體)로 하고 그 위에 2.43m 높이의 머리 부분을 조각하여 올려 놓았다.
파주 용미리 불상에 비해 규모는 작으나 조성한 솜씨는 우수하다. 전체높이는 12.38m이다.
제비원 미륵불 뒷쪽에는 연미사라는 조그마한 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 중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하여 연미사는 폐사되기에 이르고 다만 석불만 남아 있었다.
1934년 연미사(燕尾舍) 유지(遺址)에 사찰을 새롭게 조성하고 구전(口傳)에 따라 연미사(燕尾寺)로 하였다.
법당인 대웅전은 1978년 증축하였는데 기존의 정면 3칸, 측면 1칸의 대웅전을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증축하였다.
1986년 단청함으로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동이천동석불상이 위치한 이 지역은 속칭 ‘제비원’으로 불린다.
그런데 이름에서 '원'은 사람들이 여행길에서 쉬어가던 일종의 여관을 뜻한다.
이는 고려시대부터 지방으로 출장 가는 관리들의 숙소로 쓰기 위하여 교통 요지에 있는 사찰을
국가적인 차원의 숙소인 ‘원(院)’으로 지정하여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영남에서 충청도나 경기도, 또 서울로 갈 때에는 반드시 안동을 거쳐 소백산맥을 넘어야 했는데,
그 길목에 있던 것이 바로 연비원 (燕飛院)이었다.
따라서 연미사(燕尾寺)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전설의 배경이었던 ‘연(燕)’, 즉 ‘제비’에 국가지정 숙박시설인 원(院)이
결합 되어 ‘제비원’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제비가 날아가는 쪽의 형세라고 해서 ‘연비원’ 또는 ‘연미원’ 이라고 하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석불상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을 모두 아우르는 명칭으로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특히 제비원은 성주풀이에서 ‘성주 본향이 어디메냐, 경상도 안동땅 제비원이 본 일러라’라는 사설에 나오듯이
우리나라 성주민속신앙의 정신적인 근원지로서 자리매김되어 있는 뜻깊은 장소이다.
석가탄신일이 지났지만 연미사에는 불자들의 소망을 담은 연등이 미륵불로 오가는 길에서 길손들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있다.
제비원 미륵불에는 다양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첫번째는 옛날 어떤 형제가 가장 뛰어난 조각가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문득 세상에는 뛰어난 조각가가 둘일수는 없다는 생각에 형제는 실력을 겨루어서 지는 사람이 죽기로 했다.
약속한 날까지 휼륭한 미륵을 다듬기로 한 형제는, 아우는 부지런히 돌을 갈고 다듬었지만 형은 빈둥 빈둥 놀기만 했다.
그리하여 약속한 날이 되자 그날까지 동생은 미륵불을 완성하지 못했는데
형은 미륵의 머리만 조각해서 바위 위에 가져다가 얹어 훌륭한 불상을 만들었다.
동생은 내기에 진 까닭에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동생이 만든 조각은 개천가에 굴러다닌다고 한다
.
지금 제비원 미륵불상의 목부분을 보면 이어서 만든 흔적이 있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이것은 형이 머리부분만 조각하여 붙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임진왜란 당시 구원병으로 우리나라에 온 이여송은 전란이 평정되자 우리 나라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훌륭한 인물이 날 만한 地穴(지혈)을 찾아 地脈(지맥)을 끊고 쇠말뚝을 박았다고 한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던 이여송이가 말을 타고 제비원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말이 우뚝 서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이었다.
이상하게 여긴 이여송은 사방을 둘러보니 저 멀리 앞길에 제비원의 큰 미륵불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필경 저 미륵불의 조화 때문에 말이 못 움직인다고 생각한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빼 미륵의 목을 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말이 다시 움직이며 앞으로 나갔다는데, 그때 칼로 목이 베인 까닭에 미륵불의 목 부분에는 목이 베일 때
흘린 핏자국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고, 왼쪽 어깨에는 그때 밟힌 말발굽 자국이 있다.
당시에 떨어진 목은 오래도록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는데 어떤 스님 한 분이 와서 떨어진 목을 제자리에 갖다 붙이고,
횟가루를 이음새에 붙이면서 염주 모양으로 불룩 나오게 다듬어 놓았다.
그래서 지금도 그때 이은 자리는 마치 염주를 목에 걸어 놓은 것처럼 보인다.
세번째는 돌부처로 다시 태어난 연이 처녀가 있다.
근데 전해져 오는 전설이 다 슬프기만 하다.
제비원 미륵불을 볼수있는 기회가 있다면 전설을 곁들여서 살펴보면 더 좋을것 같다.
비가 오는 날이라서 그런지 참배객은 몇 보이지가 않는다.
고즈녁한 산사의 풍경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은것 같다...잠시나마 석불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본다.
바라보는 각도에 따라 나타나는 석불의 표정도 다양하다.
때론 자애롭게...때론 굳건하게...때론 강직하게 수많은 불자들을 아우르고 있다.
가는 날에 연미사에서는 행사가 있었던 모양이다.
처음 보는 사이인데도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시며 행사에 쓰였던 떡이라면서 봉지 하나를 건네주시는 보살님...
쫄깃하고 달콤한 떡의 맛처럼 기분좋은 하루였다.
제비원 미륵불 앞엔 작은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제비원 솔씨공원 이라고 한다.
제비원 가까이에는 이송천과 솔밤, 솔티, 송현, 송천, 솔뫼 등
솔을 중심으로 한 지명이 많아 솔의 본고장임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송림의 애절함을 느낀 안동시에서 2009, 2010 년 사이에 울진 금강송 11그루와 옥동 육송 2그루,
예안면 정산리에 있는 150년 된 소나무 3그루,
옥동의 육송 14그루를 옮겨 심어 소나무의 본향이라는 뜻을 담아 제비원 솔씨공원을 조성하였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 자리한 제비원 미륵불 그 온화한 미소에 왜 안동의 얼굴이라고 부르는지 알것 같다.
비에 젓은 하루였지만 마음만은 뽀송 뽀송한 하루였다.
'행복 사진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경남/통영시/가볼만한곳]천년의 신비 옻칠문화 통영 옻칠미술관에서 색채의 아름다움에 빠져들다 (0) | 2012.08.05 |
---|---|
[경남/통영시/가볼만한곳]동화같이 아름다운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을 돌아보다 (0) | 2012.08.04 |
[울산/남구/가볼만한곳]고래의 바다 울산 고래의 고향 장생포 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에서 고래를 만나다 (0) | 2012.06.30 |
[경북/경주시/가볼만한곳]읍천항 주상절리 파도소리 길 (1) | 2012.06.30 |
[경북/경주시/가볼만한곳]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 가장 잘 만들어진 괘릉 (1) | 2012.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