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야외 유적지는 대부분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독 소나무가 많은데 오릉으로 가는 길은 왕릉 주변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버드나무숲이 우거져 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하늘 향해 우뚝 솟은 모습이 주변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 준다.
힘들게 자연휴양림까지 가서 산림욕을 즐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주변은 울창하고 나무 그늘도 많아서 아주 시원하다.
돗자리 하나 펴고 나무 그늘에 누워 흘러가는 구름을 벗 삼아 보내는 하루라면 몸과 마음에 에너지가 충만하게 쌓일 것 같다.
이곳에 있는 다섯 무덤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과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임금 네 분과
박혁거세 왕의 왕후 알영부인의 능으로 전해 온다.
이는 삼국사기에 네 분의 왕을 담엄사 북쪽 사릉원 내에 장례를 지냈다는 기록과,
삼국유사에서 박혁거세 왕이 승천한 후 유체가 다섯으로 나뉘어 땅에 떨어지자 이를 각각 장사지내어
오릉이 되었다는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알 수 없으나, 겉모습은 경주 시내 평지 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다.
1호 무덤은 높이 약 7.86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경주의 많은 왕릉들은 정확하게 누구의 것인지 알려진 무덤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백제의 무령왕릉처럼 묘지석이 발견되지가 않아서 삼국유사 등에 나오는 기록에 의해 추정만 할 뿐이라고 한다.
오릉의 규모가 상당하여 주변을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경주 왕릉 둘레길이라고 이름 하여도 될 정도로 자연과 친화된 환경이 힐링의 묘미를 일깨워 준다.
다른 지역의 왕릉과는 다르게 여러 개의 왕릉이 모여 있는 모습이 정감 있고 친근해 보인다.
어떻게 관리를 하면 잔디가 이리도 예쁘게 자랄 수 있을까.
해마다 왕릉의 풀베기할 때의 모습이 장관을 이룬다고 한다.
이걸 다 풀베러면 동원되는 인원들도 상당할 것 같다.
[신라 박혁거세 이야기]
고조선 멸망 후 그 유민들이 경주로 와서 6촌을 이루어 살았다고 한다.
어느 날 6촌장이 나라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는데 이 때 양산(남산) 나정 곁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앉아 울고 있어서 그곳을 살펴보니, 알 한 개가 있었다.
알을 깨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목욕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더 밝아졌다.
이로 말미암아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라고 지었다고 전해온다.
얼마 뒤에는 알영정 가에 계룡이 나타나 겨드랑이에서 계집아이를 낳았다.
태어난 곳을 따서 계집아이의 이름을 알영이라고 지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남산 서쪽 기슭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으며,
기원전 57년에 혁거세를 왕으로 받들고, 알영을 왕비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서라벌이라고 하였다.
기원전 57년에 건국된 신라(서라벌)는 한반도의 남동쪽에서 세력을 확장하였고
당과의 동맹을 통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무너뜨리고
676년 비록 대동강과 원산만 이남 지역에 한정되긴 했지만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루었다.
이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민족 문화가 발전하는 토대를 만들고 문화의 황금기를 영위하게 되었다.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호족들로 인해 분열되면서 935년 신라는 992년간의 긴 역사의 막을 내렸다고 한다.
영원할 것 같던 신라의 천년 역사도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탄생 이야기이니까 정확하지는 않을 것 같다.
왕은 알에서, 왕비는 연못에서 탄생하였으니 그 신비로움이야 오죽하였을까.
오릉 주변의 소나무들도 왕의 무덤을 알아보는 것 같다.
신하 된 마음이 이런 걸까.
많은 소나무들이 무덤을 향해 기울여져 있다.
마치 그 옛날 왕을 알현하던 신하의 모습을 재현한듯하다.
[제각]
제사를 지내는 것과 관련된 건물인 것 같다.
[숭의문 뒷면]
[제각 정면]
주변에 오래된 나무들은 왕의 호위 무장들처럼 왕릉 주변을 지켜주는듯하다.
[숭의문 정면]
제를 지내기 위해서는 숭의문을 통과하여 제각으로 가는가 보다.
일전에 제례복을 입고 이곳에서 모여있는 어르신들을 본 기억이 있다.
옛날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무덤을 이렇게 크게 지었을까.
생전에 살아있던 생활 그대로 내세에서도 그러하기를 바란 자식의 효성 깊은 마음이 더 컸던 걸까.
아니면 신분을 나타나내는 과시의 역할을 담당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동원되었을 그날의 역사에 백성들의 고생은 없었을까.
생각하다 보면 그 이유도 끝이 없을 것 같다.
평범한 신분으로 태어났으면 이렇게 만천하에 공개가 되는 일은 없었을 텐데
어쩌면 죽어서도 만인에게 우려러 보이고 싶었던 욕망은 없었을까...ㅎ
무덤 하면 아무래도 친근감보단 거리감이 더 드는게 사실인데 옛 왕릉은 그런 느낌보단 멋있단 생각이 먼저든다.
이렇게 오릉을 한 바퀴 돌고 나면 몸도 마음도 상쾌해진다.
소나무 숲과 왕릉이 주는 치유의 선물인듯하다.
오릉의 관람이 끝났다면 왕비의 탄생지인 알영정과 알영각을 둘러보자
알영각 주변은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어 한층 경치를 돋보이게 한다.
[알영정 입구]
잘 정돈된 정원의 모습이 보기가 좋다.
[알영각-알영왕비 탄강 유지 비각]
시조 왕비의 탄생 역시 보통과는 달라서 용이 알영정 우물가에 나타나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나니
동내의 안노인이 신기하게 여겨 양육하고 우물 이름을 따서 알영이라고 지었더니 자라서 훌륭한 덕을 갖추시고
왕비가 되시어 시조 왕을 잘 보필 하시어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세우시니 백성들이 이성이라고 불렀다.
박혁거세 왕과 알영 왕비의 탄생이 이렇게 신비하니 두 분이 서로 맺어진 것도 요즘 말로 치면 인연인듯하다.
저 문으로 들어가면 알영정이란 연못이 나온다.
[알영각 정면]
[알영정]
시조 왕께서 탄강하시던 그날에 알영정에서 계룡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홀연 오른쪽 옆구리에서 한 여아를 탄생하고 용은 간 곳이 없었다.
때마침 이 우물가에서 빨래하던 한 노구가 있어 북천에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광채가 빛나는 것을 보고
시조 왕의 탄생과 영이함을 방불하기에 육부 촌장들이 봉양 하였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두 성아를 지금의 남산 옛 창림사 터에서 봉양하여
탄생 후 13년 만에 육부 촌장들이 추대하여 신라 시조 왕과 왕후로 삼았다고 전한다.
알영정의 내부는 생각보다 좁아 보인다.
용이 나타난 상서로운곳인데 상상하기에는 세월의 간극이 너무 크다.
[숭덕전 내부 부속건물]
뒤쪽으로 알영정과 알영각이 있다.
[숭덕전 내부 부속건물]
[숭덕전 내부 부속건물]
[숭덕전의 출입문인 영숭문]
숭덕전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의 제사를 모시기 위한 건물로 세종 11년(1429)에 지었으나 선조 25년(1592)에 불탔다.
동왕 34년(1601)과 광해군 10년(1618)에 다시 지었고 숙종 30년(1704)에 고쳤다.
경종 3년(1723) 숭덕전이라는 편액을 걸었는데 현재의 모습은 영조 11년(1735)에 고친 것이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모든 것을 주관하였으나 임진왜란 이후에 와서 박씨 문중에서 주관하여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시조 왕의 신도비와 비각]
관람요금 : 어른(1,000), 군인, 청소년(600), 어린이(400)원이다.
관람료는 엄청 저렴한데 한가지 유의할 사항은 주차료가 있다는 것이다.
소형(1,000), 대형(2,000)원이다.
사실 비싼 요금은 아닌데 주차하기가 힘든 번화가도 아닌데
주차요금을 징수한다는 것이 조금 이해하기 어럽다.
먼저 이런 사실을 알고 방문을 한다면 마음이 무겁지는 않을 것 같다.
요것만 빼고 나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어서 적극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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