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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사진관

[서울/종로구/가볼만한곳]조선의 으뜸 궁궐인 경복궁을 돌아보다

 

 

[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루가 있으며, 왕족·외척·상궁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흥선대원군이 중건하면서 1865년(고종 2) 12월 25일 상량했다.

 

서울은 예전에는 자주 올라 갔었는데 그때도 서울관광을 위해선 나서본적은 없었던 것 같다.

거리도 만만찮고 지금처럼 교통편이 좋았던것이 아니어서 집나가면 개고생이란 말이 생각날정도로 힘들었는데

요즘은 대중교통이나 직접 운전을 하지않아도 여행사를 통하여 오니 참 수월하다.

 

 

 

 

3월 1일 삼일절 연휴를 맞이하여 대구 여행자클럽을 통하여 서울 나들이를 하였다.

텔레비젼 사극에서는 많이 보아왔던 경복궁을 이제서야 눈으로 본다고 하니 솔직히 맘이 조금 찡하다.

세상에 맘만 먹는다고 할수 있는 일이 얼마나 있을까마는 여행을 통하여 평소에 보고 싶었던 것을 볼수 있으니 너무 좋은것 같다.

 

 

 

 

도착하자 마자 들어선 경복궁 입구에서 수문장 교대식이 진행되고 있다.

 

조선시대 수문장은 흥인지문, 숭례문 등 도성문과 경복궁 등

국왕이 임어(생활)하는 궁궐의 문을 지키는 책임자였다.

 

수문장은 정해진 절차에 따라 광화문을 여닫고 근무교대를 통하여

국가의 중심인 국왕과 왕실을 호위함으로써 나라의 안정에 기여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수문장 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조선 예종 1년 (1469년)으로

그 이전까지는 중앙군인 오위(五衛)의 호군(護軍)이 궁궐을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다.

 

 

 

 

수문장 교대의식 : 10시, 13시, 15시 / 1일 3회 / 소요시간 20분

광화문 파수의식 : 11시, 14시, 16시 / 1일3회 / 소요시간 10분

수문군 공개 훈련(협생문 밖) : 9시 35분(15분간) / 12시 35분 (15분간)

문의 : 02.3210.1645~6

 

 

 

 

질서 정연하게 도열한 군사들의 모습이 기개가 느껴진다.

군사들이 입고있는 의복에서 지위를 알아볼 수가 있다고 한다.

수문장은 무관 4품으로 궁성문 수호 책임자이고 그 밑으로 갑사, 차복, 기수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에 보아도 참여 인원이 많아보이는데 그 당시에는 규모가 어떠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때도 교대식을 볼러고 사름들이 몰러들었을까...ㅎ

 

 

 

 

[광화문光化門]

경복궁의 정문. 1395년(태조 4) 처음 지어질 때는 사정문(四正門)이라 했다가 1425년(세종 7) 광화문으로 개칭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4년(고종 1) 중건했으나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1927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한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문루가 소실되었다.

이후 복원공사에 들어가1968년 12월 11일 준공했지만 원위치에서 조금 벗어나 있고

철근콘크리트 구조라는 한계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이전·복원공사에 착수해2010년 8월 15일 준공했다. 

 

좌, 우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있어서 제대로 볼수도 없었고 사람들 틈에서 사진을 찍는다고

잘 나온 사진이 없지만 교대의식을 볼 수 있었다는것에 만족할수 밖에 없다.

 

 

 

 

휴일 관광은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이 아쉽다.

평일 관광이라면 여유로운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볼텐데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면

일행과 헤어지지않기위해서라도 바쁠 수 밖에 없다.

 

 

 

 

[흥례문興禮門]

광화문을 지나면 나오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1395년(태조 4) 지어졌으며 1426년(세종 8) 홍례문(弘禮門)이라 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 중건하면서청나라 건륭제의 이름인 홍력(弘曆)을 피휘하여 흥례문으로 개칭했다.

1916년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건설하면서 철거되었다가 85년 뒤인2001년10월 26일 복원되었다.

 

 

 

 

드디어 경복궁 안으로 들어섰다.

춘삼월이긴 하지만 아직까진 파릇파릇한 새싹들을 보기가 힘들어 경내는 생각보단 썰렁하다.

 

 

 

 

[근정문勤政門]

근정전의 정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건물로 1867년(고종 4) 중건되었으며

일곽의 행각과 함께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초기의 임금들은 여기에서 즉위식을 거행한 다음 근정전의 옥좌에 앉아 문무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길게 회랑이 이어져 있고 그 밑으로 넓은 배수로가 만들어져 있다.

그 당시에는 궁내를 빠져 나가는 물의 양이 많았는가 보다.

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한 시설이었던지 배수로 끝부분에는 철창살이 설치되어 있다.

설마 현대에 설치된건 아니겠지...ㅎㅎ

 

 

 

 

경복궁은 서울특별시에 있는 조선시대의 궁궐 중 하나로 사적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시대의 정궐(법궁)로,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한양 천도를 단행하면서 가장 먼저 지어진 궁궐이다.

 

이름을 지은 이는 정도전인데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어라. 임이시여 만년동안 큰 복을 누리소서)에서

끝의 景福을 딴 것으로 큰 복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잔치 끝에 천자에게 바치는 노래였는데 정도전은 연회 중 대취한 태조 이성계가

"경은 이번에 새로 지은 궁궐의 이름을 지어서 우리 왕조가 만대까지 빛나도록 하라"는

명을 내리자마자 즉석에서 일어나 궁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주요 전각들의 이름을 붙인 것도 모두 정도전이다.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도 정도전이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중국의 자금성에는 비할수 없지만 아름다움에서는 앞설것 같다.

궁궐의 출입문이라서 그런지 입구가 상당히 많다.

이곳에서도 신분의 고하에 따라 출입구가 결정되었을것 같다.

그래도 정문으로 들어가고 싶은건 무슨 마음일까...ㅍㅎ

 

 

 

 

[유화문維和門]

근정문에 들어서기 전 그 서쪽에 있으며, 궐내각사로 통하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문이다.

유화문도 흥례문과 마찬가지로 1916년에 철거되었다가 2001년 복원되었다.

 

 

 

 

궁궐 내부가 넓어서 그렇지 절대 사람들이 적은것이 아니다.

사극에서 보면 대신들이 품계에 맞게 서있던 품계석도 보인다.

 

 

 

 

[근정전勤政殿]

경복궁의 정전으로, 국가적인 대례를 거행하던 장소이다.

다포식 건축으로는 현존하는 것 중 국내 최대 규모이며, 2단의 석축기단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의 2층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천장에 있는 금박 입힌 두 마리의 목조 용조각의 발톱이 7개인 것이 특징이다.

1395년(태조 4) 건설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1867년(고종 4) 중건했다.

일제가 조선총독부를 지을 때도 철거당하지 않았으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3호로 지정되었다.

 

 

 

 

너무나 잘 알려진 건물이기에 달리 설명할 것도 없을것 같다.

 

 

 

 

근정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해태상이 지키고 있다.

해태는 시비나 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이라고 한다.

 

 

 

 

단청의 화려한 색상이 으뜸이다.

문양의 우아함과 단청의 색감이 어우려지는 지붕의 모습은 근정전의 웅장하고 장엄함을 돋보이게 한다.

 

 

 

 

근정전은 밖에서 보면 2층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층이 나누어져 있지않고 단층으로 되어있다.

근정전 한가운데엔 임금이 앉는 용상(龍床)이 있고 그 주변과 천장을 화려하게 장식해 놓았다.

용상 바로 뒤에는 나무로 만든 곡병(曲屛)이 있고 그 뒤로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 놓여 있다.

일월오봉병은 임금의 자리 뒤에 세워놓는 병풍이다.

이름 그대로 해(日)와 달(月), 다섯 개의 산봉우리(五峯)를 그린 병풍을 말한다.

일월오악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여기서 일월은 음양 또는 왕과 왕비를 상징한다.

천장에는 여의주를 문 채 힘차게 꿈틀거리고 있는 용 두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두 마리의 용은 근엄하고 역동적이며 여기서 용은 왕을 상징한다고 한다.

 

 


 

근정전 건물은 돌로 쌓은 널찍한 2층 기단 위에 있다.

이 돌 기단을 월대(月臺)라고 한다.

월대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난간의 조각들이다.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작(朱雀) 현무(玄武)의 사신(四神)을 비롯해

쥐(자·子) 소(축·丑) 호랑이(인·寅) 토끼(묘·卯)와 같은 십이지신, 이런저런 서수(瑞獸·상서로운 동물)들을 표현한 것이다.

십이지의 열두 동물 가운데 용 개 돼지는 빠져 있고 간혹 십이지라고 보기 어려운 동물도 포함되어 있다.

 

 

 

 

경복궁 근정전(국보 223호)은 1867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세워졌다.

근정전은 ‘근면 성실하게 국정을 펼치는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왕의 즉위식, 문무백관의 조회, 외국 사신 접대 등 왕실과 국가의 공식적인 의식을 거행하던 곳이라고 한다.

왕이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보고를 받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업무는 근정전 뒤쪽에 있는 사정전(思政殿)에서 이뤄졌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왜 근정전 월대 난간에 동물을 조각해놓은 걸까.

근정전과 경복궁을 지켜달라는 염원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 왕조의 안녕과 번영에 대한 갈망이기도 하단다.

 

 

 

 

[만춘전萬春殿]

사정전의 동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부속 전각이다.

온돌이 시설되어 있어서 주로 봄에 사용했다.

전각이 세워진 뒤 불탔다가 중건되는 과정은 사정전과 동일하나 만춘전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어 주춧돌만 남은 적이 있었다.

그 때문에 궁궐의 온돌 시설을 살펴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곳이었지만 1988년 원위치에 건물이 복원되었다.

 

 

 

 

[사정전思政殿]

왕의 신하들과 함께 정사를 돌보는 편전으로 사용하던 정면 5칸, 측면 3칸의 건물이다.

내부의 바닥이 마루였기 때문에 주로 여름에 사용했다.

1395년(태조 4) 지어진 뒤 1553년(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모두 전소되었고, 이후 1867년(고종 4) 중건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전각의 사방이 벽 없이 창과 문으로만 된 점이 특징이며, 내부의 어좌 위에는 운룡도가 있다.

사정전의 뜻은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곳’이란 뜻이란다.

건물들이 너무 밀집되어 있어 사진을 찍기가 참 애매한 곳이다.

하다 보니 외부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보이질 않는다...ㅎ

 

 

 

 

정말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경복궁이다.

집마다 출입문마다 이름이 적히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건물에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 같아 이곳이 궁궐이었다는 것이 실감 난다.

 

 

 

 

[강녕전康寧殿]

임금의 침전으로 사용한 정면 11칸, 측면 5칸의 전각으로 건물 앞에는 월대가 시설되어 있으며,

주변에는 강녕전의 소침인 연생전·경성전·연길당·응지당이 있다.

강녕전진찬도(康寧殿進饌圖)에는 강녕전과 4채의 소침이 회랑을 통해 서로 이어진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연결되어 있지 않다.

다만 소침의 툇마루 등을 통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다.

1395년(태조 4)에 세워질 때 정도전이 명명한 전각 중 하나이며, 1553년(명종 8) 화재로 불탔다가 1년 뒤에 중건했지만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터만 남았다가 흥선대원군이 다시 중건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희정당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이 과정에서 경복궁에 있을 때는 없던 용마루가 생겼다.

 

건물의 이력들을 보면 정말 바람잘 날 없던 건물들의 수난사를 보는 것 같다.

지금 현재 경복궁 내 건물들의 대부분이 새로이 복원된 건물이라고 하니 안타깝고 아쉽다.

 

 

 

 

[경성전慶成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왼쪽 서소침으로 지어졌으며, 동쪽에 있는 동소침인 연생전과 마주 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응지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연생전延生殿]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고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제후 3침의 제도에 따라

강녕전 오른쪽에 동소침으로 지어졌으며, 서쪽에 있는 서소침인 경성전과 마주 보고 있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에 복원했다.

 

 

 

 

[흠경각欽敬閣]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1438년(세종 20) 세종대왕이 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 관측소이다.

이곳에는 각종 천문 관측기구가 있었으나 1553년(명종 8)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했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고종 때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의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일제강점기에 창덕궁 내의 건물이 화재로 많이 소실된 것 같은데 혹시나 일본 거시기들의 소행인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교태전交泰殿]

정면 9칸의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쪽에 있는 왕비의 침전.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다.

부속 전각으로 동쪽에는 원길헌(元吉軒), 서쪽에는 함홍각(含弘閣), 동북쪽에는 아미산을 바라볼 수 있는 누마루인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고종 때 중건된 교태전은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구하기 위해

1920년 창덕궁으로 이건 했고, 지금의 건물은 1995년에 복원했다.

 

강녕전과 거의 똑같은 교태전이다.

근데 창덕궁은 화제가 얼마나 났길래 경복궁 내의 건물을 옮겨 복원을 하였던 걸까.

일제강점기에 일어난 화재라서 많이 아쉽고 또한 대한 제국의 몰락을 알리는 것 같아 씁슬하다.

만약 현재까지도 왕조가 이어져오고 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기도 하다.

 

 

 

 

궁내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았던 걸까.

건물마다 붙어있는 방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하다.

궁내의 관리는 잘 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관람 내내 내부 관리를 위한 사람들은 못 본 것 같은데 행여나 관광객으로 인한 건물의 훼손이 있을지 몰라 걱정이 된다.

 

 

 

 

[함원전咸元殿]

교태전 서쪽에 위치한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 세종대왕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1888년(고종 25) 중건했지만

일제강점기인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내전 일곽이 화재로 전소되자 여기에 들어갈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복원했다.

 

 

 

 

일행이 있다면 함께 다니지 않으면 이산가족이 될 것도 같다.

사진 찍는다고 홀로 뒤에 쳐져 있다 보니 마음은 급해지고 올바른 관람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그러다 보면 항상 글을 쓰면서 다시 관람하는 기분으로 돌아온다...ㅋ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를 이어온 궁궐인데 경내에는 의외로 조경수가 많지 않다.

건물의 아름다움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데 의외로 조경 쪽은 많이 썰렁하다.

 

 

 

 

[아미산峨嵋山]

경회루의 연못을 팔 때 나온 흙을 쌓아 만든 세 단의 화계(花階)로 교태전의 뒤편에 있다.

여기에는 2.6m 높이의 육각형 벽돌 굴뚝 4개가 있는데, 교태전의 온돌 방에서 나오는 연기를 배출하기 위해 만들었으며,

각 굴뚝의 여섯 벽면에는 다양한 길상문으로 아름답게 꾸며 그 예술적 조형미와 가치를 높게 평가받아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慈慶殿]

원래 이 자리에는 자미당(紫薇堂)이 있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1867년(고종 4)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고종의 양어머니인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었지만 1873년(고종 10) 화재로 소실되어 1888년(고종 25) 중건했다.

동쪽 정면은 정면 10칸, 측면 4칸의 자경전이고, 여기에 정면 1칸, 측면 2칸의 청연루(淸燕樓)와 정면 6칸, 측면 2칸의 협경당(協慶堂)이 맞닿아 있으며,

서쪽 뒤쪽으로 정면 2칸, 측면 6칸의 방실이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에 현존하는 유일한 연침 건물이며, 1985년 1월 8일 보물 제809호로 지정되었다.

 

[자경전 꽃담]
자경전 서쪽에 있는 담장으로 황토색 전돌과 흰 삼화토를 사용해 만든 벽면에 각종 길상 문자와 길상 도안, 기하학적 문양을 장식했다.

서울특별시가 '서울 10대 대표색'을 선정하면서 이 꽃담의 색깔을 '꽃담 황토색'으로 명명해 포함시켰다.

서울시내의 택시 중 꽃담 황토색으로 도색된 차량이 종종 보이는데,

도입 초기에는 X색 같다며 거부감이 많았지만 지금은 자주 보니까 익숙해져서 친근해진 모양이라고 한다.

 

일행들 뒤꽁무니만 쫒아다니다가 여기 자경전 앞에서 만났는데

아름다운 자경전의 내부는 구경도 못하고 멀리서 바라보는 모습으로 아쉬움을 달랬던 곳이다.

 

 

 

 

담벼락에도 무늬를 넣어서 만들 정도로 장인들의 예술정신이 뛰어났던 것 같다.

아치형 출입문에 기와지붕까지 멋있어도 너무 멋있다.

 

 

 

 

작은 출입문 위에도 이름이 있다.

선장문은 아미산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한다.

 

 

 

 

굴뚝 하나에도 예술성이 돋보인다.

굴뚝 하면 집 바로 뒤에 있다고 생각하였는데 궁궐의 굴뚝을 담을 뒤에 두고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거리를 많이 뛰어놓은 것은 아마도 연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

 

 

 

 

궁전의 지붕의 네 귀퉁이에는 여러 가지 동물 모양의 장식이 보인다.

동물들을 장식하는 이유는 액을 막기 위한 것으로,

그 형상은 주로 용(龍)·봉황(鳳凰)·사자·기린·천마(天馬)·해마(海馬)·물고기·해태·원숭이 등이라고 한다.

지붕의 선을 타고 앉은 동물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새롭고 신기한 모습이다.

 

 

 

 

숨돌릴 틈도 없이 경복궁 내를 돌아다녔다.

건물 내부의 모습은 보지도 못하고 외부만 빨빨 돌아다니다가 경회루 근처에 와서야 한숨을 돌려본다.

 

 

 

 

짧은 시간 안에 경복궁을 관람하기란 애초에 무모한 일이었다.

그래도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러고 재빨리 다녔는데 웬걸 못 본 것이 너무도 많은 것 같다.

 

 

 

 

[경회루慶會樓]

1395년(태조 4) 경복궁 창건 때 연못을 파고 누각을 세웠으나 지대가 습해 건물이 기울자

1412년(태종 12) 연못을 대규모로 준설해 동서 128m, 남북 113m의 방지(方池)를 조성하고 경회루를 세웠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에는 누각을 지탱하는 돌기둥에 용조각을 새겼다고 하나

1867년(고종 4) 중건할 때는 무늬 없는 통돌로 바뀌었다.

 

 

 

 

지금의 경회루는 정면 7칸(34.4m), 측면 5칸(28,5m)으로 현존하는 한국의 목조 건축 중 규모가 가장 크며,

1985년 1월 8일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 10000원권 지폐 구권의 뒷면 도안이기도 했다.

 

 

 

 

경회루 야경의 모습도 정말 아름다울 것 같은데 지금은 그 모습을 상상으로만 즐길 수밖에 없다.

물속에 있는 커다란 대야는 연꽃을 위한 대야인가 보다.

 

 

 

 

잔잔한 물결에 투영된 경회루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울 것 같은데

이런 찍어놓고 보니 물속에 잠긴 대야가 옥에 티다.

 

 

 

 

연못 안에도 둑을 만들어 한껏 운치 있는 연못을 만들어 놓았다.

물색이 맑고 투명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바닥에 녹조가 발생했는지 오묘한 빛깔이 난다.

 

 

 

 

경회루의 뒤  담 쪽에는 정자 비슷한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용도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나무에 새순이 돋아나 푸름에 물드면 정말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할 것 같다.

 

 

 

 

방문한 날엔 황사가 얼마나 심하던지 바로 앞의 건물들도 온통 희뿌연 안개 속에 잠긴 것 같다.

맑은 날의 풍경과 푸른 하늘을 볼 수 없어서 아쉽고도 아쉬운 순간이었다.

 

 

 

 

여행자 클럽을 통하여 방문한 것이라서 시간이 다소 부족했던 것 같다.

자유여행 비슷한 것이라서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다른 곳의 구경을 하는 시간이 짧아지니까

아쉽지만 마지막으로 경회루의 모습을 멀리서 다시 한번 담아본다.

 

 

 

 

[국립민속박물관]

전신은 1924년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가 세운 조선민족미술관이다.

1945년 광복 이후 개칭과 통합을 거쳐 1972년 지금의 건물이 세워져 1975년 개관했으며 7,089점의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불국사 청운교와 백운교, 법주사 팔상전, 금산사 미륵전, 화엄사 각황전 등 대표적인 불교 사찰을 조합해서 만든 기이한 외관 때문에

유교 국가의 정궁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냥 무식하게 불교 사찰을 때려 밖은 외관 때문에 민속박물관으로서의 기능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음에도

경복궁 복원 과정에서도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경복궁 바로 옆에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는데 함께 관람하면 좋을 것이다.

조선의 으뜸 궁궐 경복궁을 돌아본 기억은 오래도록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 같다.